본캐와 부캐
자신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성장하기 위한 세포 분열이다.
1.
‘본캐’와 ‘부케’라는 단어는 게임에서 익숙하게 사용했다. ‘본캐’는 처음 만든 캐릭터를 말한다. 가장 먼저 시작한 만큼 레벨이 가장 높고 고급 장비를 착용하고 가장 경험이 많은 강력한 캐릭터다. ‘부케’의 생성은 다양한 클래스를 경험하고 싶거나 게임 세계에서 본캐가 너무 유명(?)해서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한 경우 몰래 만든 계정이거나 본캐와는 다른 클래스(역할)로 플레이하고 싶거나 본캐로 하지 못하는 시도를 하거나,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면서 자신의 인맥을 넓히는 데 부캐를 이용하기도 했다.
2.
이런 본캐와 부캐가 게임의 세계를 벗어나면서 의미와 용도가 확장되었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시간을 쓰거나 주 수입원이 되는 일을 하는 모습이 본캐가 되고, 부업에서의 모습이 부캐가 된다. 힙합 가수 ‘마미손’이 나왔을 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매드 크라운”이었다. 마미손이 밝힌 부분은 복면을 쓰기 전의 자신이 인기 아티스트였다는 것뿐, 그동안 갖고 있었던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 안에서 새로운 것을 하기가 어렵기에 스스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작품 활동을 하고자 정체를 숨기고 복면을 쓴 것이라 직접 말하기도 하였다. 최근 부캐 용어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재석의 유산슬, 김신영의 다비 이모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정체성으로 연예계에서 계속 활동하기에 부캐로서 부를 수 있다.
3.
부캐의 시작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바로 필명(筆名)이다. 소파 방정환이 사용한 필명을 30여 개 정도라고 한다. 이원록의 필명은 이육사다 이원록은 ‘(그릇된)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스티븐 킹과 해리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앤 K. 롤링은 각각 리처드 바크먼,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다. 롤링은 “명성에 기대지 않고 신인 처지에서 평가받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3개월도 되지 않아 실제 작가가 롤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당시 평은 괜찮았지만 판매가 미미하던 추리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자기 앞의 생’(1975년)을 발표하고 한 작가에게 한 번만 주는 프랑스 최고 권위 공쿠르상을 ‘하늘의 뿌리’(1956년)에 이어 두 번 받았다. 같은 인물이라는 건 그가 죽고 1년 뒤에야 밝혀졌다. 작가들이 필명을 쓰게 된 이유는 다양하다. 본명이 너무 평범하다는 이유, 작가로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로 등단할 때부터 필명을 쓴 이유. ‘나는 작가다’라는 자기 선언이자 문학적 창조성에 대한 간절한 희구다.
4.
게임 속의 부캐, 그리고 필명을 사용하던 시대의 부캐와는 다른 점이 있다. 자신을 감추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성장하기 위한 세포 분열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약물의 힘을 빌어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고 때론 ‘23 아이덴티티’처럼 자아분열이나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해석될 부캐의 모습이 보편적으로 쓰이며 용도가 확장되고, 밀레니엄 세대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느낌을 주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일인 백색
‘백인 일색’에서 ‘일인 일색’을 거쳐서 ‘일인 백색’의 시대가 되었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직장에서와 퇴근 후가 다르고 페이스북을 볼 때와 트윗을 올리거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때에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모티콘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유쾌하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고 온라인이라는 무대가 있었던 밀레니엄 세대에게 다양한 캐릭터로 표현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아주 익숙한 행위였다.
올인원 금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에는 불확실성이 크다.
일이 전부였던 시대에서 이제는 최소한 직업이라는 본캐 이외에 현재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부캐가 필요하다. 부캐도 하나로는 절대 부족할 정도로 세상에는 탐험하고 즐길 다양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멀티플레이어 시대
여자배구선수로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배구 여제’라고 불리는 슈퍼스타 김연경 선수는 다수의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프로 연예인들 못지않은 예능감을 뽐냈다. ‘식빵 언니’라는 자신의 별명을 딴 유튜브 채널을 외국 팬들을 위해 영어 자막까지 붙여 운영하는 인기 유튜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주로 청소년들을 위한 스포츠 아카데미를 오지에서 성곡적으로 운영하는 사업가로서도 활동한다. 팬들이나 세상의 요구 이기도 하고, 자신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스타가 아니더라도 관계를 위한 다양한 요구와 자신의 욕구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로 제한된 캐릭터로는 부족하다.
다양하니 재미있네
마미손이나 유산슬을 완전 별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뻔히 보이는 거짓말한다고 하거나 시청자를 바보로 보냐고 화를 내 거나 하지 않는다. 같은데 다르다며 꾸미고 주장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모르는 체 봐주면서 즐기는 게 색다른 재미가 된다.
인스타그램의 복수 계정은 개인 일상용, 덕질용, 맛집용, 반려동물용 등의 부캐들로 다양해지고 순간순간 색다른 나로 변신하며 재미가 더해진다.
5.
기업도 부캐를 만들고 있다. 시대의 공감을 위한 콘텐츠와 커머스를 결합한 ‘콘텐츠 커머스’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물적 분할을 통한 문어발 확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ODG는 ‘You were a kid once’라는 슬로건으로 아이의 옷을 판매하는 온라인 스토어다. ‘ODG’는 본캐보다 부캐인 유튜브 채널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스트리트 브랜드’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튜브 채널을 보면 옷을 파는 온라인 스토어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콘텐츠로 가득 채워 저 있다. 아이와 어른, 그리고 세대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자는 캠페인성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모베러웍스
한 사람이 퇴사를 신청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MoTV’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한다.
브랜딩의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고 구독자들은 댓글로 참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탄생한 브랜드가 ‘MO BETTERWORKS’이다. 그들은 프로젝트 과정을 통째로 공개하기도 한다. ‘오리온’과의 제품 브랜드 론칭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고 모든 과정과 회의하는 모습, 문제를 풀어가는 모습을 솔직 담백하게 보여 준다. 이쯤 되면 여기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회사인지, 유튜브 크레이에터인지, 프로젝트 그룹인지 이들을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는 것도 쉽지 않다. ‘프리 워커’ 그들만의 스토리를 지금도 담아내고 있다.
자신의 여러 측면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밀레니엄 세대. 표현이 가능한 플랫폼들의 출현, 그런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 사회적 분위기 등이 본캐와 부캐의 세상을 만들었다. 다양성이 발현되는 플랫폼으로 본캐와 부캐로 당당하게 즐기길 바란다. 물론 본캐에 충실한 삶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참고 글
표정훈 출판평론가 - 작가의 필명
박재항 MZ세대 키워드